신앙촌 생명물간장 미국 ‘아마존’ 입점

신앙촌 생명물간장 미국 ‘아마존’ 입점

美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입점으로 신앙촌 생명물간장 브랜드 가치 상승 기대 신앙촌 생명물간장이 미국의 대표적인 온라인 쇼핑 플랫폼 ‘아마존’에 진출해 소비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아마존은 미국 인구의 약 68~83%가 이용하고 있으며, 특히 18~29세 연령층에서는 약 90%가 이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존 입점은 엄격한 검증 절차를 거치는 만큼, 해당 브랜드의 신뢰성과 가치를 확인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 더불어 미국 시장 진출로 브랜드의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이고, 미국 내 대형 유통업체 입점 기준을 설정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이에 따라 신앙촌 물류영업부에서는 아마존을 통한 매출 증진을 위해 추가 제품 및 신앙촌 브랜드 스토어와 포스트를 준비 중이며, 이를 통해 브랜드의 다양성을 확대하고 고객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존재할 수 없는 은하’ 발견에 당황한 과학자들

‘존재할 수 없는 은하’ 발견에 당황한 과학자들

탄생 시기에 비해 너무 거대한 은하 기존 우주론을 뒤흔들 수도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JWST)이 130억 년 전에 만들어진 거대 은하를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이 은하의 발견이 기존 우주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ZF-UDS-7329로 알려진 이 은하는 태양계가 속한 우리은하보다 훨씬 더 많은 별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큰 규모의 은하가 우주가 시작된 지 불과 8억 년 만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최초의 별 그룹이 모여들어서 은하를 만든 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과정이 빅뱅 이후 수억 년 동안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현재 우주론에서는 암흑 물질 후광과 가스, 먼지가 혼합되어 초기의 원시 은하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10~20억 년 이후 초기의 원시 은하는 왜소 은하로 성장했고, 왜소 은하들끼리 서로 합쳐지면서 점차 우리은하와 같이 큰 은하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초기에는 은하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암흑 물질 후광이 축적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ZF-UDS-7329과 같이 큰 은하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제전파천문학연구센터의 천문학자이자 연구 공동 저자인 클라우디아 라고스는 이번 연구에 대한 성명에서 “은하 형성은 암흑 물질이 어떻게 집중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우주 초기에 이처럼 극도로 거대한 은하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표준 우주론 모델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이 연구 결과는 2월 14일 네이처(Nature) 저널에 발표되었다. 연구 공동 저자이자 호주 스윈번 공과대학의 천문학자인 테미야 나나야카라는 “이것은 은하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진화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기존 우주론을 새롭게 쓰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제임스 웹과 같은 고급 망원경 덕분에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불가능해 보이는 우주의 신비를 더 많이 발견하고 있다. 연구팀은 ZF-UDS-7329와 유사한 은하에 대한 탐구를 계속할 계획이며, 이와 같은 은하들이 발견된다면 은하 형성에 대한 기존 이론이 더욱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제임스 웹 망원경의 발견이  우주의 기원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있다

제임스 웹 망원경의 발견이 우주의 기원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있다

제임스 웹이 보내는 데이터가 전례 없이 혁명적인 일 하고 있어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JWST)이 기존에 알고 있던 우주와 그 기원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고 많은 천문학자들이 말했다. 코넬대학교 천문학과 교수 조나단 루닌은 지난 2월 28일 가톨릭 뉴스 서비스에 “망원경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임스 웹이 감도, 파장 범위 및 이미지 선명도 측면에서 전례 없는 힘을 갖고 있어 혁명적인 일을 하고 있으며 여러 분야에서 흥미롭고 새로운 발견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 2021년 12월 25일에 발사된 나사(NASA)의 제임스 웹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우주 망원경 중 가장 크고 강력하며, 우주에서 찍은 풀 컬러 이미지와 데이터를 지구로 전송하고 있다. 나사(NASA)는 제임스 웹이 우주의 현재 상태가 아닌 과거의 상태를 보여준다고 설명하며, 이는 인류가 “우주의 기원을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루닌 교수는 최근 새롭게 발견된 빅뱅 초기의 은하들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기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아요. 마치 보육원에 갔는데 세 살짜리 아이들이 모두 벌써 10대처럼 생겼다는 걸 발견한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우주론자들은 우주의 초기 시대에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고 성장했는지를 수정해야 합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막스 플랑크 천문학 연구소의 연구원 안나 드 그라프는 “지구는 하나뿐이고 어쩌면 매우 특별한 장소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버드 대학교 천문학 교수 카린 외베르그는 “과학은 우주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우주에서 우리가 모든 생명체를 운반하는 유일한 방주인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하며 “만약 우주의 다른 곳에서 생명체가 발견된다면, 그것이 박테리아든 이성적인 동물이든, 그것은 새로운 신학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비상사태 선포된 아이슬란드 화산폭발

비상사태 선포된 아이슬란드 화산폭발

아이슬란드 레이캬네스반도 그린다비크 마을 인근에서 화산이 폭발해 연기가 치솟고 용암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진=AFP) 아이슬란드에서 약 한 달 만에 화산이 또 폭발했다. 미국 CNN 방송 등에 따르면 16일(현지 시각) 오후 8시께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약 40㎞ 떨어진 남서부 레이캬네스반도에서 화산이 분화했다. 지구 물리학자 마그뉘스 튀미 그뷔드뮌손은 “이번 분화가 최근 발생한 것 중 가장 강력하다”고 말했다. 또 과학자들은 이 지역의 화산 분화가 수년간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伊 아동성범죄 신부에 이례적 형 선고

伊 아동성범죄 신부에 이례적 형 선고

가톨릭교회가 이탈리아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면 중요한 판결 최근 이탈리아 사법부가 미성년자에 대한 가중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돈 주세페 루골로 신부에게 4년 6개월의 형을 선고했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이 사건은 미성년자 성폭력, 사건 은폐, 소아성애자 신부의 교구 이동, 금전으로 피해자 입막음 등 추악한 사건의 결정체라는 것이 밝혀졌다. 시칠리아 출신의 루골로 신부의 범죄는 미성년자 시절 루골로에게 수년 동안 성학대를 당했던 30대 청년 메시나의 신고로 수사가 시작됐다. 수사 도중 루골로는 지난 10개월 동안 하루 평균 60회에 걸쳐 밤낮 가리지 않고 셀 수 없이 많은 음란 사이트를 광적으로 서핑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십대’라는 키워드를 검색했으며, 최근에는 19세인 두 청년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조사가 시작되자 지사나 주교는 “젊은이의 어리석음에 불과하다”며 루골로 신부를 옹호했고, 이후 사건을 은폐하려 했음을 시인했다. 또한 루골로를 옹호한 지사나 주교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는 훌륭하고 항상 올바른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메시나의 변호를 맡은 엘리아나 파라살리티 변호사는 자신과 메시나, 그리고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들이 위협을 받고 고소를 당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재판 중에 경찰이 뒤따라 왔다며 폭로했다. 그동안 이탈리아 가톨릭교회는 바티칸의 존재로 인해 독특하게도 학대와 은폐와 관련해 큰 사회적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유죄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가톨릭교회가 이탈리아 사회, 특히 작은 마을 시칠리아에서 휘두르는 영향력을 고려하면 중요한 판결이다.

살인으로 유죄 판결 받은 지 30년만에 평신도 된 신부

살인으로 유죄 판결 받은 지 30년만에 평신도 된 신부

포르투갈 푼샬 교구는 지난 2월 28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포르투갈 신부인 프레데리코 마르코스 다 쿠냐를 평신도화 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쿠냐는 1993년 여러 명의 미성년자를 성폭행하고 15세 소년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가톨릭 신부가 평신도가 되는데 31년이 걸린 것이다. 1950년 브라질에서 태어난 쿠냐는 80년대 초 로마에서 공부하는 동안 포르투갈 교황청 대학에 살았으며, 그곳에서 테오도로 데 파리아 신부와 친구가 되었다. 훗날 마데이라 주교로 임명된 파리아 신부는 쿠냐를 사제로 서품하고 개인 비서로 삼았다. 신부가 된 쿠냐는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는 장식용 해골을 좋아해서 검은 폭스바겐 앞에 해골 장식을 걸고,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다녔다. 그가 과음한다는 소문, 미성년 소년들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1992년 5월, 15세 소년이 절벽 아래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부검 결과 그가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심한 구타를 당한 것이 드러났고 전날 쿠냐 신부와 차를 타고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목격자들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쿠냐는 체포되었고, 체포 당시 그의 집에서는 쿠냐의 트레이드 마크인 선글라스를 착용한 10대 소년사진을 포함해 그가 찍은 것으로 보이는 성학대 당하는 소년들의 누드 사진 모음이 발견됐다. 이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쿠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파리아 주교는 쿠냐를 예수만큼 순결하다며 변호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는 쿠냐의 무죄를 보장하라는 교회와 정치계로부터 극심한 압력을 받았다고 말했다. 결국 쿠냐는 살인과 아동 성학대로 유죄판결을 받고 13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감옥에 투옥되었던 쿠냐는 외출을 빙자해 감옥에서 나와 여권을 발급받고 브라질로 도주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범죄자에게 여권을 발급한 브라질 측에 공식 항의했지만, 대사관 직원이 감옥에 있는 쿠냐를 방문했기 때문에 브라질 외교관들이 그의 지위를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2022년 포르투갈 교구의 성직자 명단에는 여전히 쿠냐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올라가 있었고, 2024년이 되어서야 성직자에서 해임되었다. 해임 결정에 왜 30년이 넘게 걸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성직 임명식, 신앙교육 개최

소비조합을 통해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셔

교황의 우크라이나 백기 협상 발언, 러시아에게 무한 전쟁의 권한 주는 것

[나침반] 로마 수녀원 연못, 캐나다 원주민 기숙학교 어린이 1,000명 이상 암매장 外

2023 전국 신앙촌상회 우수 매장 선정

법원, 천부교 비방 영상 올린 가톨릭 신부에게 삭제 권고

KBS <사사건건> 반론보도문 게재

SBS 프로그램 <당신이 혹하는 사이> 반론 보도문 게시

신앙체험기

“하나님 계신 단상 앞에 눈송이 같은 이슬성신이 내려”

“하나님 계신 단상 앞에 눈송이 같은 이슬성신이 내려”

저는 1937년 인천광역시 동구 창영동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어머니를 따라 감리교회를 다녔는데 1956년경 어머니께서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신 후로 제게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집회에 다녀오신 후로 “앞으로는 박태선 장로님 교회에 가야 한다. 박 장로님은 보통 분이 아니시다. 거기가 진짜다”라고 하시며 저도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집회에서 향취를 맡았다고 하시는데 그게 무엇인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오래 다니던 교회를 두고 다른 교회에 가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어머니의 확신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인천의 한 짠지 공장에 마련된 예배실이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예배실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예배를 드렸고, 늦게까지 남아 철야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참 기도에 집중하고 있는데 과거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하던 때의 기억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먹을 것이 없어 모두가 굶주리고 있던 때에 미군들이 배에 구호 물품을 싣고 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구호 물품 나눠주는 곳에 가보니 넓은 바닥에 강냉이, 수수 가루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가져가게 했습니다. 당시 열다섯이었던 저는 커다란 보자기에 강냉이 가루를 가득 퍼담았고,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시 가서 한 번 더 퍼왔습니다. 저는 그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뒷사람은 생각도 않고 너무 욕심껏 퍼왔던 제 행동이 부끄럽고 후회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려웠던 그 시절에 큰 구루마에 장작을 가득 싣고 가는 사람 뒤를 따라가다가 몰래 장작 한 개비를 뽑아 달아난 뒤 저잣거리에 가서 돈이나 떡으로 바꾼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사람들은 그때는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 말에 위로받고 잘못을 애써 외면해 왔습니다. 하지만 철야기도를 드렸던 그날은 너무나 추하고 더러웠던 과거의 죄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고 오랫동안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지독한 탄내가 났습니다. 예배실 안에서 날 만한 냄새가 아니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기도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코를 손으로 감싸 쥐며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난다고 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이 바로 죄타는 냄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죄가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고 과연 박 장로님이 세우신 교회는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다녀보기로 했습니다. 그 후 숭의동에 인천전도관 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했고 저도 작게나마 일손을 보태게 되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바닥에 구들장 까는 일을 맡았고, 구들장 위에 바른 시멘트가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친구들과 밤새 찬송을 부르며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불렀던 찬송가 ‘나의 갈길 다 가도록’은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지어지고 얼마 뒤에 저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며 찬송을 부르시던 중 단상에서 눈송이 같은 것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몽글몽글한 눈송이들은 흩날리면서 예배실로 퍼져나갔고, 저는 신기한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께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눈송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로만 듣던 이슬 같은 은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슬비 또는 안개 같은 은혜를 봤다고 했는데 제 눈에는 꼭 눈송이 같아 보였습니다. 1957년 4월에는 서울 중앙전도관 낙성 집회(1957. 4. 25.~5. 4)가 있었습니다. 낙성 집회 기간에는 제2회 전도관 체육대회(4. 25~4. 27)도 함께 열려 서울운동장에서 배구, 농구, 축구, 릴레이 달리기 등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인천 대표로 경기에 출전하여 배구와 육상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배구 등 경기에 직접 참여하실 때면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날은 전국의 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선의의 경쟁을 벌였던 즐겁고 가슴 벅찬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집회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는데 하루는 하나님 말씀을 듣던 중 아주 좋은 향기가 바람처럼 저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향이었기에 저는 그것이 어머니가 전에 맡았다는 향취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카시아 꽃향기보다 더 진하고 좋은 그 향기를 조금 더 맡고 싶었지만 향기가 어느새 사라져서 저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향기를 잡을 수만 있다면 잡아두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얼마 뒤 하나님께서 소사신앙촌을 만드신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인천전도관 식구들 중에서도 건설대로 자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생겨났고, 저도 뒤늦게 자원하여 소사신앙촌 건설대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땅을 파서 건물의 기둥 세우는 일을 했는데 일을 하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고, 식사 준비를 위해 커다란 쌀가마니를 번쩍번쩍 들면서도 무거운 줄 몰랐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현장에 오셔서 건설대원들에게 자주 안수를 해주셨고, 안수를 받은 건설대원들은 힘이 나서 더욱 신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몸이 약했던 제가 어떻게 건설대 일을 했을까 싶지만, 그때는 힘든 줄도 모르고 즐겁기만 했습니다. 함께 일하던 건설대원들도 ‘참 신기하다. 무거운 것도 가뿐하게 들리는 것이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참 많이 하곤 했습니다. 소사신앙촌 건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저는 메리야스 공장으로 부서를 옮겨 일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촌 메리야스가 품질 좋기로 입소문을 탔던 때라 공장은 활기차게 운영되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끼며 기쁘게 일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오버로크 작업자들에게 일감을 가져다주기 위해 원단을 나르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원래 다니던 길이 아닌 기계 바로 옆을 지나가다가 빠르게 회전하는 기계의 모터에 치마 끝자락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치마가 모터 속으로 휘말리면서 저는 몸의 중심을 잃게 되었고, 다리까지 모터에 감겨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그 순간 모터가 멈춰서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저는 정신을 잃었고, 그 뒷이야기를 동료들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사고를 목격한 동료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저를 업고 바로 하나님 앞으로 데려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저를 축복해 주시더니 “이제 일어나라!”고 하셨고, 그 순간 제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신이 드나?”라고 물으셨고, 저는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괜찮다고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저는 꾸벅 인사드린 후 두 발로 걸어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다리를 크게 다쳐 정신을 잃었던 제가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다리를 보니 피부에 난 상처에서 진물이 나오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솜을 붙여 놓았습니다. 며칠 후에 솜을 떼어보니 깨끗하게 아물어서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 저는 고향인 인천으로 내려왔다가 백령도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그곳에는 전도관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이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십여 년 동안 교회에 가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예배를 드리지 못하니 마음이 괴롭고 답답했던 저는 다시 인천으로 이사를 갔고, 그리웠던 인천전도관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 후 1970년대 초반에 기장신앙촌에 내려가 하나님께 안수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오래 교회에 가지 않았던 저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죄송했습니다. 혹시 꾸중하지는 않으실까 걱정하며 안수를 받는데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죄짓지 마. 죄지으면 안 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무딘 마음으로 생활했던 제 모습을 다 아시고 하신 말씀인 것 같아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야겠다는 뼈아픈 결심도 그날 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점 심해져서 머리 빗질도 못 하고, 세수도 못 할 정도로 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가보니 등뼈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뒤로 많이 물러난 상태라며 수술을 권했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축복일 날 버스 맨 뒷자리에 누워서 기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기장에 도착해서 축복을 받으러 가는데 하필 하나님 계신 곳 바로 앞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저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며 “괜찮아?”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시더니 넘어진 저를 향해 강하게 축복해 주신 후 이제 됐으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신기하게도 허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져 버린 저는 기장 내려올 때 버스 뒷좌석에 누워서 왔던 길을 집에 돌아갈 때는 똑바로 앉아서 갔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제가 하나님께 축복받고 병이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회자되었습니다. 저 역시 너무나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었기에 집에 가는 내내 마음속으로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얼마나 많이 기도드렸는지 모릅니다. 인천전도관에 다니던 시절부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예배실 안에 가득한 그 많은 사람을 한 명도 빠짐없이 안수해 주시면,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병이 나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증거하는 사람들의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신기한 광경이었는데 제게도 그 크신 권능을 베풀어주셨음이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따르며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깨달은 뒤로 어디를 가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고, 천국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진정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 귀하신 뜻을 따라 맑고 성결하게 살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귀한 은혜를 주시는데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귀한 은혜를 주시는데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열아홉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 지산리에서 살던 저는 스물일곱 살에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막 3살, 5살이 된 어린 남매를 두고 남편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잃은 충격과 슬픔은 뒤로한 채 당장 아이들과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했고, 저는 원래 살던 집을 정리하고 아이들과 시댁 바로 옆집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작은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그로 인한 수입은 아이들을 키우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생계에 대한 막막함과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제 마음은 점점 병이 들어 결국 환청까지 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은 귀에서 ‘너를 죽이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서 너무 무서운 나머지 시댁으로 달려가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덜덜 떠는 저를 본 시댁 식구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불러와야겠다며 집 바로 맞은편에 있는 지산 전도관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전도사님을 포함한 전도관 사람들은 저를 둘러싸고 찬송을 부르며 정성껏 예배를 드려주셨습니다. 찬송 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한참 찬송을 부르던 전도관 사람들은 안정을 되찾은 제 모습을 보더니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시고 전도관에 꼭 와보시라며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갔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로 다시 환청을 듣는 일은 없었습니다. 건강을 되찾은 저는 너무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 지산 전도관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서른, 1971년의 일입니다. 그 후로도 경제적인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지만 전도관을 다닌 이후로는 전처럼 마음이 괴롭거나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편하고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시댁 식구들이 제가 전도관 다니는 것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도관 덕분에 제 병이 나은 것을 직접 봤으면서도 왜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안면몰수하는 것은 저를 도와준 곳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반대를 무릅쓰고 전도관을 다녔습니다. 시댁 식구들의 눈을 피해 몰래 전도관에 간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산 전도관에는 교인들이 쉴 수 있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저는 그 방에 누워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워있던 제 목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똑똑똑 떨어졌습니다. ‘천장에서 물이 새나? 비도 안 오는데 왜 물이 새지?’ 하고 생각하던 찰나 몸에서 무언가가 싹 빠져나가면서 몸 전체가 시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느낌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몸속까지 싹 씻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드리니 그때부터 향기로운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맛있고 좋은 향이던지 저는 연거푸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그 향을 계속 맡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향은 사라지고 지독한 탄내가 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가려고 교회 문밖을 나서는데 몸의 무게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발걸음이 둥둥 떠서 공중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걸어왔는지 날아왔는지 모르게 집에 도착하고 나니 또다시 그 타는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냄새를 맡으니 살면서 제가 지었던 크고 작은 죄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집에서 몰래 삶은 계란을 집어 먹었던 일을 포함해 그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모두 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드리자 지독하게 풍겨오던 냄새는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8일 동안 타는 냄새를 맡고 회개하는 기도를 반복하고 나니 더 이상 지독한 탄내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 이야기를 들은 전도사님은 제가 은혜받았다며 향기로운 냄새는 향취 은혜이고,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는 죄 타는 냄새를 맡은 것이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겪어본 적 없었던 신기한 은혜 체험을 계기로 저는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댁 식구들의 핍박은 더욱 심해져서 저희 집까지 찾아와 훼방을 놓았습니다. 시어머니와 시동서는 제가 평소처럼 머리를 감아도 ‘어딜 가려고 머리를 감느냐’며 화를 내고, 잠깐 외출하려 해도 아예 밖에 나갈 수 없도록 문 앞에서 감시하며 가로막곤 했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전도관에 갈 수 없다는 것이 하도 속상해서 방으로 들어가 울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순간 진한 향취가 맡아졌습니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고급 향수 냄새 같기도 한 향취가 진동하니 제 마음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해졌습니다. 그날 방안에서 ‘이렇게 귀한 은혜를 주시는데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며 한참 동안 감사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지산 전도관은 저희 집과도 매우 가까웠기에 저는 심한 핍박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던 때에는 마당으로 나와 전도관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찬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마당 앞에 서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기도를 드리다가 눈을 떴는데 어디선가 베틀로 가지런히 짠 직물처럼 넓고 곧게 뻗은 빛줄기가 제 앞으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 빛은 분명 전도관 쪽에서 오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새벽에 그렇게 환한 빛이 나올 곳이 없는데 제 앞으로 오는 빛줄기는 너무도 밝고 선명했습니다. 빛을 바라보며 신기해하고 있는데 그 순간 마음속에 기쁨이 물밀듯 차오르고 몸이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저는 ‘은혜를 주시는구나!’ 생각하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가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1976년에는 시댁에서 나와 광주에 있는 친정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사 직후에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광주공원 근처에 전도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위치를 알아두기 위해 미리 가보았습니다.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고 집에 돌아와서 다음날 새벽예배를 갔는데 완전히 다른 건물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되었지만 건물에 광주 전도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기에 들어가 보니 정말로 그곳이 전도관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전도관이라 착각하고 다녀온 곳은 다른 기성교회였고,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진짜 전도관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는 그때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후 광주 전도관을 다니며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 안찰을 받으러 기장신앙촌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그때 하나님을 뵙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미소로 사람들을 한 명씩 안찰해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찰 받을 때 아프다고 하는데 저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귀한 은혜를 내려주시는 분을 직접 만날 수 있어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광주에 온 이후로 저는 시장에서 빵을 팔며 간장과 메리야스 등 신앙촌 제품도 함께 판매하고 있었는데, 1996년 12월에 생명물두부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가운 소식을 들은 저는 새벽에 두부를 받아서 광주 양동시장에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동안 신앙촌 제품을 좋아해 주는 고객들이 많았기에 분명 두부도 인기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두부는 처음 선보이는 것이라 조금 긴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고객들은 생명물두부에 큰 관심을 보였고, 신이 난 저는 신앙촌에서 나온 두부가 얼마나 맛있고 좋은 제품인지 설명하며 가져간 두부를 모두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두부를 판매하고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여니 향취가 강하게 맡아져서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동안 하나님의 권능으로 시신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지산 전도관에 다니던 시절,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한 아가씨가 입관 예배를 마친 후 아름답게 피어난 광경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라웠는지 모릅니다. 파리했던 안색이 뽀얗게 피어나고, 굳어있던 팔다리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병색이 완연했던 고인의 생전보다 더욱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몇 해 전에는 제가 다니는 광주 서동 천부교회의 권사님이 돌아가셨는데 생명물로 깨끗이 씻겨드리고 입관 예배를 드리자 너무나 환하게 피어나서 그 자리에 있던 교인들 모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의 권능은 이토록 확실했습니다. 그렇기에 저 역시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이 길을 따라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순간순간 들어오는 죄 된 생각을 안 하려 노력하고 온 마음을 다해 기도드리는 날에는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리는 것이 보여집니다. 부족하기만 한 제게 기쁨의 은혜를 허락해 주시며 곁에서 늘 힘이 되어주신 하나님.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감람나무 가지들에게 바라셨던 대로 죄짓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신앙체험기 특집

천부교회를 찾아서

뉴스
서울 중앙 전도관 (이만제단)낙성집회 때 내리는 이슬성신

제39회 이슬성신절 전시실에는 서울 이만제단 낙성집회 때 내린 이슬성신 사진이 전시되었다. 이만제단 낙성집회 기간 중, 1957년 4월 30일에 제1회 장로 임명식이 열렸는데 그날 촬영된 이슬성신이 폭포수같이 내리는 모습의 사진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만제단 낙성집회 기간 중에 1957년 4월 30일은 제1회 장로 임명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이만제단으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 예배실에 들어섰을 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어서 ‘어머나! 이게 뭐지?’ 하며 깜짝 놀랐습니다. 제 눈이 어떻게 된 줄 알고 얼른 두 눈을 비비고 깜빡여 보았지만 온통 뿌옇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쨍쨍 햇볕이고 파란 하늘인데 예배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뽀얀 구름에 완전히 덮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사람들의 형상이 보이는데, 제 주위에는 고름투성이의 환자들이 누워 있었지만 나쁜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았고, 오히려 상쾌한 바람이 삭삭 스치고 지나가면서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시원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150명이 넘는 어른 분들을 장로로 임명하신 후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를 짚으시며 안수해 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 당시 서울대와 중앙대 교수님, 수도공고 교장 선생님 등 이만제단에 열심히 나오시던 분들이 장로로 임명되셨습니다. 특히 그날 촬영한 사진에는 이슬성신이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찍혀 있어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저는 온 제단에 이슬성신이 뽀얗게 덮여 있던 그때의 광경이 또렷이 떠오르곤 합니다. <355회 강문형 권사 신앙체험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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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속 천부교 역사
행함의 종교 천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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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세계 종교 탐구 <39> 순교는 천국을 보장하는가-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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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침반] 로마 수녀원 연못, 캐나다 원주민 기숙학교 어린이 1,000명 이상 암매장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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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

[나침반] 암 투병 15세 美 소녀 축복하러 온 사제, 더듬으며 만져 성추행으로 체포…. 그 ‘축복’의 효능 어떤 건지 外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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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람들

“발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신앙촌, 좋은 결과 보여줄 것 기대”

“발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신앙촌, 좋은 결과 보여줄 것 기대”

지난해 개설되어 현재까지 신앙촌 사원들과 SANC식품여고 학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3D 그래픽 교육 프로그램. 강의를 맡은 이주희 강사는 굴지의 온라인 게임 회사 출신으로 다양한 경험, 탄탄한 실력을 갖춘 3D 그래픽 전문가다. 평일은 일하고 주말에는 강의하러 신앙촌에 내려오는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지만 오히려 일할 기회가 있어 감사하다는 이주희 강사. 강의를 하게 된 계기를 묻자 대학을 졸업하고 반사 활동을 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직장생활과 반사활동을 병행하며 이주희 강사는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 반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정말 열심히 반사 활동을 하던 그 시기에 생각지 못하게 지인을 통해 이직 제안을 받게 됐다. “당시 엔씨소프트는 설립한 지 몇 년 안 된 게임 회사였는데 ‘리니지’라는 게임을 출시해 승승장구하고 있었어요. 정말 운 좋게 괜찮은 회사에 들어가게 된 거죠. 반사 활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복을 주신 거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후속작을 만드는 신규 팀에 합류한 이주희 강사는 게임 속 배경을 3D로 구현하는 일을 맡았고, 실력 있는 동료들과의 협업, 다양한 실무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게임 제작은 시나리오 작가에서부터 그래픽 디자이너, 프로그래머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하는데요. 수만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게임 서버 개발은 프로그래머분들이 하시고, 제가 포함된 아트팀은 게임 캐릭터와 함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마을이나 성, 던전 등을 3D공간으로 연출했어요.” 게임이 출시되기 전까지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한다. 밤을 새우는 것은 다반사였고, 그런 날에는 가까운 사우나에서 씻고 다시 와서 작업을 이어갔다. 강도 높은 업무 속에서 좋은 결과물을 얻으려면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함도 배웠다. “팀의 분위기가 그랬어요.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지적할 건 지적하고 수정할 건 수정해야 한다는 분위기였죠. 디자이너가 밤을 꼬박 새워 만든 그래픽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꼭 수정을 거쳤어요. 쓴소리를 받아들이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오고 그 사람도 한층 성장할 수 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리니지2’는 출시와 동시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흥행에 성공했고, 이후 중국까지 진출하며 성공 세를 이어갔다. 이에 이주희 강사는 중국으로 파견되어 더욱 바빠졌고, 그에 비례해 교회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기도를 드려도 반사 활동할 때만큼의 절실함이 없더라고요. 그게 늘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는데 신앙촌에서 강의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온 거예요. 당시 제가 회사도 이직하고, 학교에 강의를 나가던 시기였는데 신앙촌에서도 강의하면 너무 좋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주희 강사가 신앙촌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권용자 권사, 전농교회)가 본인보다 더 기뻐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그동안 제가 신앙촌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하셨대요. 저를 위해 오래도록 기도해 주신 어머니의 마음이 깊게 와닿더라고요. 어머니와 함께 신앙의 길을 간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하고 감사한 일이었구나 하고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신앙촌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져 강의하러 신앙촌에 오면 복잡했던 생각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이주희 강사는 느끼는 것이 많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 축복일에만 오다가 매주 신앙촌에 오면서 이곳의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어린 학생에서부터 연세 지긋하신 분까지 심성이 곱고 행동이 바르셨어요. 신앙인이 모여 사는 곳이라 그런지 확실히 신앙촌의 분위기는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르더라고요.” 또한 수업할 때 분위기와 반응도 좋고, 수강생들의 집중력도 높다고 덧붙였다. “고등학생들도 그렇지만 사원들의 열의가 대단해요. 이분들은 퇴근 후에 공부하시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수업을 재미있어하시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무척 적극적이세요. 어떤 분들은 공부를 정말 많이 해오시기도 하고요. 피곤하실 법도 한데 어디서 그런 열정과 집중력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분들의 배우려는 의지와 노력을 보고 저 역시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주희 강사는 수강생들이 3D 그래픽을 배우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직접 결과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수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과물을 만들고 성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실무에서도 그 능력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고, 새로운 시도도 해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수강생들에게 전시회를 해보자고 제안했더니 역으로 메타버스로 신앙촌을 만들어보자, 사원 아파트 도면을 3D로 구성해 보자 등등 다양한 제안을 해주시더라고요. 이미 수강생분들도 배운 것을 토대로 각자의 분야에서 어떤 방식으로 결과물을 만들지 고민하고 계신 거였어요. 신앙촌 분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분들이기에 앞으로 더 좋은 결과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생명물의 권능을 보고

생명물의 권능을 보고

20세 전후쯤 인천 구월동에 살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영등포집회에 어머니와 함께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어떻게 가게 된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의 광경만은 선명합니다. 집회는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는데, 저희는 집회가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난 후에야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찬송을 3~5시간 동안 계속해서 부르셨는데, 예배를 드리는 천막 안에 안개가 짙게 끼어 단상에 계신 하나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밤에는 병자들이 병이 나았다고 증거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면서 가져간 음식이 동나 먹지 못하거나 잠을 안 잤는데도 배고픔이나 피곤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또한, 어느 순간 옆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 여성이 예배를 마치고 주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공책’, ‘연필’ 하면서 가리키는 것에 대답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평생 눈이 보이지 않다가 집회에 참석한 후 눈을 뜬 것이었습니다. 집회에서는 이뿐만 아니라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벙어리가 말하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신기하긴 했지만, 이유 없이 전도관이 싫어 교회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소사 인근 국민학교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을 때도 예배드리는 장소에 안개가 끼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 안개가 무엇인지 모른 채 하루 이틀 정도만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이후에도 인천 동산중학교에서 부흥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배시간에 이상한 송장 타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 냄새가 왜 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부흥집회에 참석해 찬송을 부르는 것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전도관에 대한 제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그 후 우연히 전도관을 다니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현 인천시 계양구 박촌동에 살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제가 결혼하기 전, 불치병처럼 걷지 못하셨는데 영등포집회에 참석하신 후 은혜를 받고 걸어서 집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남편의 권유로 박촌전도관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제 마음속에는 전도관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한두 번 정도만 나간 상태였습니다. 생명물로 핀 고인의 모습 본 후 이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 깨달아 그러던 어느 날, 저의 마음을 변화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박촌전도관에 다니는 엄정분 씨의 시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잘 나가지는 않았지만, 같은 제단에 다니고 있으니 장례를 치르러 갔습니다. 그때가 김경숙 관장님이 소령으로 제대한 뒤 박촌전도관에서 시무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가서 본 고인의 모습은 김경숙 관장님 체험기에도 나오듯이 얼굴이 얼마나 흉측한지 7월 20일, 날짜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입술은 부르트고, 얼굴은 새까맣고, 눈은 부릅뜨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여름이라 선풍기를 돌렸는데도 불구하고 몸에서 나오는 진물로 인해 냄새가 심해서 밥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난 후 입관예배를 드릴 때는 뒤쪽으로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김경숙 관장님이 생명물로 고인을 씻겨 드리고,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2시간 동안 힘차게 예배를 드리자 고인 앞에 안개가 뽀얗게 내려앉았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고인의 모습이 점점 고와지면서 입술과 몸 전체가 깨끗하게 변화되는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더운 날씨에 문을 열고 입관을 하니, 지켜보던 이웃집 할머니들도 “우리도 그렇게 좀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쁘게 핀 모습을 보고 나서는 무서움도 사라져 그곳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저는 전도관에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부패하던 몸이 생명물로 환하게 피어나는 놀라운 과정을 지켜보면서, 전도관이 생명물로 변화시켜 주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전도관을 왜 싫어했는지 후회가 되었고, 그동안 저에게 보여주신 것이 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온 저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셨다는 생각에 감사함이 밀려왔습니다. 제가 어찌 높고 귀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요? 깨닫고 오기만을 바라시며 오래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는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내가 만나야 할 고객이 정말 많구나!”

“세상에는 아직도 내가 만나야 할 고객이 정말 많구나!”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면 결과가 따라올 것 믿어 신앙촌상회 인천 구월점의 김지은 사장은 ‘2023 연간사업시상식 개인 판매 부문 1위’에 이름을 올렸다.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어도 1위는 처음이라는 김지은 사장은 “귀한 상을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며 “하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기에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김지은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앞서 말했듯이 김지은 사장의 성적은 늘 우수했다. 하지만 이번에 1위까지 하게 된 데는 결정적인 한 수가 있었을 것 같았다. “지난 추석 장유 선물세트 시즌에 제가 생각한 만큼의 결과가 안 나왔어요. 하지만 실망하기도 전에 다시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가야 할지 스케줄을 짜서 설날까지 계속 달렸어요. 목표는 금액으로 설정하지 않았어요. 돈을 바라보며 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액보다는 방문해야 할 곳의 숫자를 목표로 세웠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선택받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던 금융권에서 주문이 들어와서 예상보다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 같아요.” 김지은 사장은 또한 두부 대상인 1위에 오르며 새로운 두부 판매 우수자로 떠올랐다. 그전까지 김 사장은 두부 판매는 아무나 못 하는 일이라 여겨왔다고 한다. “두부는 신선식품이다 보니 정말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납품 및 관리를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두부 판매 잘하는 사장님들이 부럽기도 하고 정말 존경스럽다고 생각해왔어요. 저는 그렇게 성실하고 부지런한 편은 아니라서요. 그런데 저희 인천지역 팀장님께서 저를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최근 알게 된 프랜차이즈 식당이 있는데 거기 본사에 가보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두부로는 영업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떨리기도 했는데요. 정말 큰맘 먹고 본사를 방문했어요. 그런데 웬걸 저보다 앞서 샘플을 주며 영업하신 소비조합분이 계셨던 거예요. 제가 한발 늦은 거였어요.” 쿨하게 포기하고 나왔다는 김지은 사장. 하지만 큰맘 먹고 시작한 두부 영업을 첫판부터 이렇게 쉽게 물러날 순 없었다. 그길로 바로 다른 프랜차이즈 기업을 검색해서 찾아가 두부를 홍보하고 돌아왔는데 얼마 뒤 그 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슨 기존에 쓰던 두부에서 계속 이물질이 검출되는 바람에 더는 못 쓰겠다며 신앙촌 두부로 바꾸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신앙촌 두부라면 믿을만하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연락받고 너무 기분 좋았죠. 어렵게만 생각했던 두부 영업을 더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꾸준하게 계속된 두부 영업. 시간이 지나며 방문했던 업체와의 거래가 차례로 성사되며 두부 판매량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두부 영업을 하면서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이상하게 피곤하지가 않더라고요. 오히려 지치지 않고 영업할 수 있는 힘과 부지런한 습관을 만들어 준 것 같아요. 두부가 저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김지은 사장은 영업하며 만나는 사람에게서 많이 배우기도 하고, 영업을 통해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고 했다. “두부 거래처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시에 일어나시는지 여쭤봤어요. 대표님은 4시에 일어나서 공장을 한 바퀴 다 둘러보신대요. 그리고 직원들 오기 전에 얼른 나갔다가 출근 시간에 맞춰서 다시 출근하신다는 거예요. 참 대단하시더라고요. 이런 분들과 거래하는 저 역시 더 부지런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달 가는 차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과 도로를 달리는 차를 보며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까? 세상에 내가 만나야 할 고객들이 정말 많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김지은 사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았다. “올해는 요구르트 런 급식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려고 해요. 제가 담당하는 지역의 어린이집을 빠짐없이 찾아가서 요구르트 런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주, 매일의 스케줄을 꼼꼼히 짜서 지켜보려고 해요.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다 보면 결과가 따라올 것이라 믿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신앙촌 제품의 가치를 전하는 새로운 도전

젊은 세대에게 신앙촌 제품의 가치를 전하는 새로운 도전

신앙촌 간장에 자부심 이제는 런의 가치 알리고 싶어 “1등을 해야겠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다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번 설에 주변의 도움으로 상을 받게 되어 감사하다는 오수영 사장은 생명물간장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진 부산지역, 특히 본사와 가까운 곳에서 영업하는 것이 가장 큰 혜택이라고 말했다. “거래처 중에 명절 때 한두 해 건너 신앙촌 간장 선물세트를 구매하는 곳이 있는데, 혹시나 하면서 본사 직원과 함께 찾아갔어요. 그런데 얼마 뒤 총회용 선물을 문의하는 전화가 와서 처음엔 꿈인가 싶었어요.” 생각지 못한 전화에 총알같이 달려갔다는 오 사장은 신앙촌 간장에 자부심을 느끼는 때가 많다고 전했다.“영업을 하다가 신앙촌 간장 한번 먹기 시작하면 다른 간장은 못 먹겠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아요.” 그는 처음엔 업체를 모두 찾아다녔지만, 한두 번 거래하다 보면 친분과 신뢰가 생겨 일을 더욱 쉽게 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신뢰가 생기면 방문할 곳과 방문하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는 곳이 구분되더라고요. 판매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더 편할지를 생각하다 보니 다른 곳에 갔다가도 저에게 다시 연락을 주시는 거 같아요. 또 그분들이 제 담당 구역에 아는 거래처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기도 해요.” 친근한 오 사장의 성격이 영업에 큰 도움이 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낯을 가리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라고. 그렇다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소비조합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어렵고 부족해도 그때그때 생각한 방향과 뜻이 옳다고 여겨지면 ‘그 환경에 나의 몸을 갖다 놓자’ 생각해요. 내 마음이 지금 당장 아니더라도요. 그러면 일이 되더라고요. 처음 요구르트 런이 출시되어 영업을 시작할 때 성격상 영업이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몇 년을 해오다 보니 경험이 쌓이고, 그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어요. 그래서 기회가 오면 꼭 잡으려고 합니다.” 2014년에 소비조합을 시작한 오 사장은 부산 주례에서 8년 정도 신앙촌상회를 운영하다가 작년 10월에 상회를 이전했다. “이상하게 신도시로 가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조건을 생각해 봤어요. 신앙촌과 가깝고, 젊은 사람들이 많은 곳. 그곳이 바로 지금의 자리, 부산 기장 일광 신도시였어요.” 시장조사를 해보니 주변에서 장사가 안된다고 했지만, 큰 결심을 하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어요. 젊은 사람들에게 런을 판매해 보자는 것이 목표였거든요. 예전보다 런의 인지도도 높아졌고, 건강에 좋다는 것도 알려졌으니, 자부심을 갖고 판매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런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세대가 많은 지역에 상회가 자리하고 있다 보니 학부모와 아이들을 볼 때마다 SNS 등 미디어의 활용과 전문적인 광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는 오 사장은 일주일에 두세 번은 주례지역에 배송하고, 신도시에서는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판매 전략을 세우며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영업에는 정해진 틀이 없는 것 같아요. 꼭 해야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자기 방식대로 하면 되더라고요. 슈퍼 영업만 하신 분이 계셨는데, 열심히 다니시다 보니 슈퍼를 여러 곳 가지고 계신 분을 만나 소개를 받고 판매 1등을 하신 분도 계세요. 다른 쪽으로도 길이 있다는 것, 내가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해주신다는 것, 그것이 저희에게는 가장 큰 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소비조합에 비해 노력이 부족하지만 방향을 잘 잡고 가고 싶다는 오수영 사장은 “지금의 자리에서 잘하고 싶어요. 그리고 신앙촌과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라며 바람을 전했다.

교양

불면증? 다이어트 효과? 커피에 대한 ‘오해와 진실’

불면증? 다이어트 효과? 커피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한국인에게 커피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음료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512잔으로, 밥심이 아닌 커피의 힘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나 커피를 사랑하지만 사실 커피에 대해 모두 알지는 못한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또는 헷갈렸던 커피의 오해와 진실에 대해 알아보자. 커피는 불면증의 원인이 된다?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 몸은 카페인을 빨리 흡수하지만, 그만큼 배출도 빨리한다. 카페인은 대략 5~7시간이면 섭취한 양의 절반이 배출되고, 8~10시간이면 75%가 사라진다. 즉 너무 늦게 커피를 마시지 않는 이상 특별히 잠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페인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위장 장애나 신경과민으로 숙면을 방해받을 수도 있다. 자신의 컨디션에 맞춰 커피를 마시도록 해야 한다. 카페인이 다이어트에 도움을 준다? 커피는 다이어트에 큰 효과가 없다. 2010년 국제비만저널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카페인은 흥분효과가 있어 신진대사를 약간 높여줄 수 있지만, 이것이 몸무게 감소에 명확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커피를 마시면 약간의 식욕억제 효과가 있긴 하지만 이것 또한 다이어트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커피 속의 카페인은 칼슘이나 철분, 아연 등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의 흡수를 막아 영양결핍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청소년이 마시면 머리가 나빠진다? 흔히 카페인을 마시면 아이들의 머리가 나빠진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결과는 없다. 성장기의 청소년들이 카페인을 많이 섭취하면 각성 상태가 길어져 머릿속에 정보 입력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커피가 직접적으로 지능을 떨어뜨린다고 볼 수는 없다. 커피가 골다공증을 유발한다? 카페인에 칼슘 배설을 촉진시키는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골다공증이 있는 사람은 커피를 많이 섭취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적당량의 칼슘을 섭취하면서, 커피도 하루 세 잔 이하 적정 수준으로 마신다면 골다공증의 위험이 크게 높아지지는 않는다. 커피가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 카페인의 각성효과 덕에 술에서 깨는 기분이 든다며 커피를 ‘해장국’처럼 마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카페인이 탈수를 유발해 혈중 알코올농도가 더 높아지고 오히려 두통과 위장질환이 심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디카페인은 카페인이 전혀 없다? ‘디카페인’이라는 단어 때문에 카페인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디카페인 커피는 카페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반커피보다 함유량이 적을 뿐이다. 디카페인의 카페인 함량기준은 각국마다 다르지만 국제기준은 97% 이상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를 뜻한다.

봄의 불청객(1) 황사

노화로 탁해진 목소리… ‘아에이오우’ 발성연습 하라

조용한 뼈도둑, 골다공증 예방하기